- 1물리올림피아드→전기공학부→변리사→변호사로 이어진 제 길은, '전향'이 아니라 같은 연장으로 재료만 바꿔 온 '한 우물'이었습니다.
- 2법적 삼단논법은 알고 보면 '자판기'와 똑같은 연역이고, 특허는 기술을 아는 사람만 지킬 수 있습니다 — 이과와 법은 생각보다 옆집입니다.
- 3실제로 서울대 전기공학부는 이공계 중 법조인을 유독 많이 배출한, 소문난 '이상한 학과'였습니다.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변리사 유연입니다.
제 이력을 들으면 사람들은 보통 두 번 놀랍니다. 한 번은 "어, 공대 나왔어요?" 하고, 또 한 번은 "근데 변호사라고요?" 하고요. 표정에 대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 사람, 인생에서 길을 두 번쯤 잘못 든 거 아닌가.'
기대하시는 답은 보통 '이과가 적성에 안 맞아 문과로 도망친 사연'입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제 대답은 좀 김이 샙니다. "저는 전향한 적이 없는데요." 정말입니다. 한 번도 길을 바꾼 적이 없거든요. 그냥 같은 연장을 들고, 깎는 재료만 바꿔 왔을 뿐입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물리에서 전기공학으로, 다시 특허와 법으로 이어진 길이 왜 하나도 안 어색한지 — 그리고 제가 나온 전기공학부가 왜 그렇게 '이상한 학과'였는지에 대해서요.
(참고로 물리올림피아드는 동상이었습니다. 금·은 다음이 동이라 자랑하기가 좀 애매한데, 그래도 메달은 메달이니 오늘 한 번 우려먹겠습니다.)
첫 번째 다리 — 변리사: 이과와 법 사이에 놓인 '유일한 다리'
이과와 문과 사이에는 깊은 강이 흐른다고들 하죠. 그런데 그 강에, 사실 다리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이름이 '변리사'입니다.
특허라는 건 기술을 모르면 애초에 손도 못 댑니다. "청구항 한 줄 쓰는 게 뭐 대수냐" 싶지만, 그 한 줄이 남의 회사가 수천억을 벌지 못하게 막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 특허를 하루아침에 종잇조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걸 제대로 쓰려면 그 기술의 원리를 속속들이 알아야 하죠. 그래서 전기·전자·반도체는 특허가 가장 많이 쏟아지는 분야이고, 전기공학도가 변리사가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코스입니다. (다만 이 다리, 통행료가 좀 셉니다. 시험이 아주 만만치 않거든요.)
저도 그 다리를 건넜습니다. 전기공학을 배우고, 변리사가 되어 특허법인에서 반도체를 비롯한 여러 기업의 기술을 '권리'로 바꾸는 일을 했습니다. D램이며 낸드플래시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회로를 문장으로 옮기는 일이었죠. 세상에서 가장 비싼 받아쓰기라고 할까요.
그러다 한 발 더 들어갔습니다. 권리를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고, 누군가 그 권리를 흔들 때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변호사가 됐습니다. 내가 만든 물건을 끝까지 애프터서비스 하고 싶은 마음, 그거였습니다.
두 번째 다리 — 법은 사실 '문과의 얼굴을 한 이과'입니다
법학은 문과의 정점, 암기의 끝판왕이라고들 합니다. 저는 정반대로 느꼈어요. 법대에 와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어? 이거 나 아는 건데?"였으니까요.
법의 기본 도구는 '법적 삼단논법'입니다. 이름은 거창한데, 알고 보면 그냥 자판기예요.
· 대전제(법조문) = 자판기 규칙 : "1,000원을 넣고 콜라 버튼을 누르면 콜라가 나온다."
· 소전제(사실관계) = 내가 실제로 한 행동 : "나는 1,000원을 넣고 콜라 버튼을 눌렀다."
· 결론(판단) = 나와야 하는 것 : "그러므로 콜라가 나와야 한다."
이게 전부입니다. 조문이라는 '함수'에 사실이라는 '입력값'을 넣어 결론이라는 '출력값'을 뽑는 것. 물리 문제에서 공식에 숫자를 대입해 답을 구하던 그 일과 구조가 완전히 똑같습니다. 자판기가 이상하게 굴 때(콜라 버튼 눌렀는데 사이다가 나올 때) 변호사가 필요해지는 거고요.
그래서 남들이 법전을 통째로 외우겠다고 밤을 새울 때, 저는 옆에서 "이거 그냥 증명 문제인데…" 하고 있었습니다. 네, 좀 얄미웠을 겁니다. 하지만 진심이었어요. 법전을 하나의 거대한 '보드게임 룰북'으로, 조문 해석을 '정리(theorem)를 증명하는 일'로 보면, 법은 낯선 나라가 아니라 그냥 새로 산 문제집이었습니다.
세 번째 다리 — 뭐든 '구조'로 뜯어보는 직업병
전기공학은 복잡한 걸 층층이 뜯어보는 훈련입니다. 신호를, 회로를, 시스템을 구조로 봅니다. 그런데 기업법무를 해보니 이게 웬걸, 똑같더군요. 회사의 지배구조, 자본구조, 계약구조 — 이름부터 죄다 '구조'입니다. 알고 보니 회사도 하나의 커다란 회로였던 겁니다. 전류 대신 돈이 흐르고, 저항 대신 규제가 걸리는.
솔직히 이건 이제 직업병 수준입니다. 가족들은 제가 드라마를 보다가 "저 합병, 교환 비율이 불공정한데…"라고 중얼대기 시작하면 조용히 리모컨을 가져갑니다. 남들 눈물 흘리는 장면에서 저 혼자 계약서를 상상하고 있으니, 같이 보기 피곤한 사람이죠.
그런데 이 '구조 뜯는 버릇' 덕에, 저는 요즘 법을 넘어 금융의 언어까지 배우게 됐습니다. 기업 가치에 값을 매기고, 재무제표를 읽고, 특허를 '만기 있는 채권'이자 '이미 프리미엄을 낸 옵션'으로 보는 일 — 이것도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응용이었습니다. 물리는 논리를, 전기공학은 시스템 감각을, 변리사는 다리를 줬고, 법과 금융은 그 위에 지은 서로 다른 방일 뿐입니다. 집은 하나인데 방이 여러 개인 셈이죠.
그런데 — 전기공학부는 원래 좀 '이상한 학과'입니다
여기까지 들으시면 "그거 당신이 유별난 거겠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또 아니에요. 제가 나온 서울대 전기공학부는, 이공계 중에서 법조인을 유난히 많이 배출한 학과거든요. 우스갯소리로 '사시 맛집'이라고들 했습니다. 반도체 만들라고 뽑아놨더니 자꾸 법복을 입고 나오니, 교수님들은 좀 서운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장 제 04학번 동기 중에도 있습니다. 지금은 '강 판사'가 된 친구인데, 같은 전기공학부를 나와 법복을 입었고, 지금은 사법연수원에서 후배 법조인들에게 인공지능을 가르칩니다. 전기공학도가 법정에 서더니, 그 법정에 이번엔 AI를 들이고 있는 거죠. 저는 이 신기한 장면을 뉴스가 아니라 옆자리 친구에게서 봤습니다. 저는 특허와 기업법으로, 그 친구는 재판과 AI로 — 출발이 같았으니 도착지가 이렇게 달라도 어딘가 닮았습니다.
동기만이 아닙니다. 공개된 이야기로 두 사람만 더 소개할게요.
· 김병필 — 서울대 전기공학부를 나와 2009년 사법연수원(38기)을 4.3점 만점의 수석으로 수료했습니다. 법대 엘리트들을 다 제친 '이공계 출신 최초의 연수원 수석'이었죠. 이분도 변리사를 준비하다 법으로 넘어갔고, 지금은 KAIST 교수로 인공지능과 법을 연구합니다.
· 김수현 — 서울과학고를 조기졸업하고 전기공학부에 다니던 중, 2013년 만 21세로 그해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자가 됐습니다. 법학은 배운 적도 없는데 단 2년 만에요. (같은 학과 사람으로서, 솔직히 조금 기가 죽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전기공학부가 사법시험을 싹쓸이했다"는 건 공식 통계로 확인된 사실은 아닙니다. 항간의 속설에 가깝죠. 다만 그런 소문이 돌 만큼, 이 학과에서 유독 많은 이들이 법으로 건너간 건 분명합니다.
왜일까요. 저는 앞서 말한 '세 개의 다리' 때문이라고 봅니다. 최상위 이과 두뇌가 모였고, 그 두뇌가 수천 번 훈련한 '엄밀한 연역'이 마침 법이라는 시험과 궁합이 잘 맞았던 겁니다. 사법시험도 결국은 '시험'이니까요. 법은 이과의 반대편이 아니라, 이과의 사고가 가장 잘 먹히는 응용 분야 중 하나였던 셈입니다.
마치며 — 저는 전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과로 전향했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저는 물리에서 논리를 배웠고, 전기공학에서 시스템을 배웠고, 변리사로 기술과 법을 잇는 다리를 건넜고, 변호사로 그 권리를 지키는 사람이 됐습니다. 지금은 그 위에 금융의 언어까지 얹는 중이고요.
돌아보면 한 번도 길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 손에 든 연장은 늘 하나였습니다 — '구조를 논리로 읽는 힘' 하나요.
혹시 지금 이공계에 계시면서 '나는 이 길밖에 없나'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이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훈련한 그 사고력은, 당신 생각보다 훨씬 멀리까지 통합니다. 전공은 당신을 가두는 벽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건너갈 수 있는 다리예요. 저는 그 다리를 몇 개 건너봤을 뿐이고요. 무섭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튼튼하더라고요.
"저는 이과에서 문과로 건너온 사람이 아닙니다. 물리에서 배운 논리를, 그저 계속 다른 재료에 써 왔을 뿐입니다. 전공은 벽이 아니라, 다리였습니다."작성 :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 · 변리사 유연
※ 본 글에 언급된 다른 인물·사례는 공개된 보도에 기초한 것이며, 통계적 순위 등 일부 표현은 항간의 속설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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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광고 — 게시자 :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 · 변리사 유연
유연의 노트
이게 증권입니까 — 코인과 조각투자 앞에서 감독당국이 던지는 단 하나의 질문
이름이 코인이냐 토큰이냐 회원권이냐는 답이 아닙니다. 남의 노력에 기대어 이익을 기대했는가를 봅니다
거래소에 있는 코인은 제 것입니까 — 파산과 해킹 앞에서 처음 확인해야 하는 한 줄
지갑에 있는 코인과 거래소에 있는 코인은 법적으로 다른 물건입니다. 하나는 내가 들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돌려달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NFT를 샀는데 저작권은 안 왔습니다 — 그래서 무엇을 산 것인지부터 정리하겠습니다
토큰과 그림은 별개의 물건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는 블록체인이 아니라 발행자가 적어 둔 문장이 정합니다
이과생이 언어영역을 못한다는 말 — 저는 그 말이 제일 아깝습니다
지금은 국어영역이라고 부르죠. 제가 본 시험은 언어영역이었고, 그때 익힌 습관 하나가 결국 제 직업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