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한보가 IMF를 불렀다"는 말은 감정적으로는 통해도, 법률가의 언어로는 과한 표현입니다.
- 2한보 사태의 본질은 부도 하나가 아니라 '이사의무·여신심사·지배구조·정경유착'이 한꺼번에 무너진 시스템 실패입니다.
- 3그래서 이 이야기는 역사가 아니라, 지금 오너 경영 기업이 점검해야 할 '내부통제 체크리스트'입니다.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 변리사 유연입니다.
변호사가 옛날 대형 사건을 다시 꺼내면 다들 표정이 살짝 굳습니다. '이 사람, 또 무슨 소송 얘기 하려고.' 안심하셔도 됩니다. 오늘은 누구를 고소하려는 게 아니라, 오래 오해받아 온 회사 하나의 별명을 조용히 바로잡아 보려는 것뿐이니까요.
'국가부도의 원흉.' 참 무시무시한 별명입니다. 회사 하나가 나라 곳간을 통째로 거덜 낸 것만 같잖아요. 한보그룹이 오랫동안 이렇게 불렸습니다. 그런데 기업 사건을 오래 들여다본 변호사로서, 저는 이 별명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다섯 명이 함께 낸 교통사고를 놓고, 조수석에 앉았던 사람 하나에게만 "네가 다 냈다"고 하는 느낌이랄까요.
1997년 1월, 한보그룹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해 말, 대한민국은 IMF에 손을 벌렸습니다. 시점이 이렇게 딱 붙어 있으니, 지금도 많은 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보가 나라를 부도냈다"고요. 앞에서 넘어진 사람이 있으면 뒤에 넘어진 사람이 다 그 탓 같아 보이는 건, 인지상정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기업전문변호사의 눈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들어가며 — "국가부도의 원흉"이라는 표현부터 내려놓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법률가로서 저는 "한보그룹이 국가부도의 원흉"이라는 문장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원흉'을 찾는 이야기는 묘하게 중독성이 있습니다. 추리 드라마가 재미있는 이유가 뭐겠어요. 마지막에 범인 한 명이 딱 잡히고, "이 사람만 없었으면 다 괜찮았을 텐데" 하는 후련함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현실의 경제위기는 그런 드라마가 아닙니다. 범인이 한 명이 아니라, 안전장치가 한꺼번에 여러 개 고장 난 사고에 가깝습니다.
외환위기는 한 기업이 만든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한보에 이어 삼미·진로·기아·해태로 이어진 대기업 연쇄부도, 금융기관에 쌓인 부실채권, 급증한 단기 외채, 바닥난 외환보유액, 그리고 아시아 전체를 덮친 통화위기 — 이 모든 것이 겹쳐 터진 복합 재난이었습니다. 브레이크 하나가 나간 게 아니라, 브레이크·타이어·핸들·안전벨트가 같은 날 동시에 말썽을 부린 셈입니다.
그러니 더 정확한 표현은 이것입니다.
"한보 사태는 IMF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된 대표적 기업범죄이자, 기업지배구조와 금융법, 정경유착이 함께 만들어낸 '시스템 실패의 상징'이었다."
원흉이 아니라 상징.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이 한 단어 차이가 이야기의 결말을 바꿉니다. 왜 중요한지, 다섯 개의 법률 쟁점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원흉을 찾는 이야기는 감정을 달래지만, 상징을 읽는 이야기는 다음 위기를 막기 때문입니다.
PART 1. 무엇이 무너졌나 — '차입경영'이라는 시한폭탄
먼저 숫자의 언어로 한보를 읽어보겠습니다. 한보철강 당진제철소는 그 자체로 야심 찬 사업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거대한 사업을 '남의 돈'으로 지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월세 살면서 옆집까지 사들여 대저택을 짓겠다고 나선 격이라고 할까요.
기업이 돈을 굴리는 방식은 크게 둘입니다. 내 돈(자기자본)으로 하거나, 빌린 돈(부채)으로 하거나. 빌린 돈을 크게 일으켜 사업을 키우는 것을 '차입경영(레버리지)'이라고 합니다. 레버리지는 지렛대라는 뜻인데, 이름 그대로입니다. 잘 되면 작은 힘으로 수익을 몇 배로 들어 올리지만, 방향이 틀어지면 손실도 똑같이 몇 배로 키우는 양날의 칼입니다. 지렛대는 무거운 돌을 들 때도 쓰지만, 잘못 밟으면 반대편에서 내 얼굴을 때리기도 하니까요.
한보는 그 칼을 극단까지 썼습니다. 자기자본에 비해 빚이 비교할 수 없이 컸고, 벌어들이는 영업이익으로는 이자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재무의 언어로 하면 '이자보상배율'이 1을 밑도는 상태입니다. 어려워 보이지만 뜻은 간단합니다. 한 달 벌어서 카드 이자도 다 못 갚는 사람 — 원금은 손도 못 대고 이자만 겨우, 그마저도 모자라는 살림. 사업을 해서 번 돈으로 이자도 못 내는 회사였다는 뜻입니다.
이런 회사는 딱 하나의 조건에서만 살아남습니다. "누군가 계속 새 돈을 빌려줄 때." 돌려막기가 멈추는 순간, 구조는 즉시 붕괴합니다. 그러니 한보의 부도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사고가 아니라, 처음부터 예약된 결말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예약이 취소되지 않고 착실히 이행됐다는 것뿐이죠.
여기서 법률가의 질문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왜, 은행들은 이자도 못 갚는 회사에 계속 돈을 빌려주었을까요. 저 같으면 지인이 두 번째로 돈을 빌리러 오면 벌써 연락처를 다시 저장하는데 말입니다.
PART 2. 기업전문변호사가 주목하는 다섯 개의 쟁점
한보 사태를 법으로 해부하면, 서로 맞물린 다섯 개의 톱니바퀴가 드러납니다. 하나만 봐서는 안 되고, 다섯이 어떻게 함께 돌았는지를 봐야 합니다.
① 이사의 충실의무·선관주의의무
회사의 이사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 회사를 경영하고(선관주의의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충실히 행동할 의무(충실의무)를 집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핵심은 하나입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의 책임'이죠. 남의 차(회사)를 대신 몰기로 했으면, 내 차보다 더 조심해서 몰아야 합니다. 회수 가능성이 불투명한 무리한 투자와 과도한 차입 결정은, 그 자체로 이사의 의무 위반과 손해배상 책임의 문제를 낳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눈 감고 액셀을 밟으면, 다치는 건 뒷좌석에 탄 주주와 채권자이기 때문입니다.
② 금융기관의 여신심사 책임과 내부통제
은행은 담보와 상환능력을 보고 돈을 빌려줘야 합니다. '여신심사'라는 게 별건가 싶지만, 사실 우리가 지인에게 돈 빌려줄 때 본능적으로 하는 계산과 똑같습니다. 이 사람이 갚을 능력이 있나(현금흐름), 안 갚으면 뭘로 대신 받나(담보). 그런데 그 판단에 담보·현금흐름이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이 끼어들었다면, 그것은 여신심사 시스템과 내부통제의 실패입니다. 은행 창구에서 "이 사람 뒤에 힘센 분이 계셔서요" 하고 도장을 찍은 셈이니까요. 한보에 물린 여신은 특정 은행 한 곳의 실수가 아니라, 여러 금융기관에 걸친 구조적 부실이었습니다. 부실채권은 그렇게 금융시스템 전체로 번졌습니다.
③ 기업지배구조(Governance)의 공백
총수 한 사람의 의사결정에 회사의 명운이 걸린 구조에서, 이사회와 감사기구는 제 역할을 했을까요. 견제해야 할 기구가 '거수기'가 되는 순간, 지배구조는 이름만 남습니다. 회의실에 브레이크 담당자가 분명히 앉아 있는데, 정작 브레이크 페달이 장식용이었던 겁니다. 한보는 '오너 리스크'가 어떻게 회사 하나를 넘어 국가 경제로 번지는지 보여준 교과서였습니다.
④ 정경유착과 부패
공직자·금융기관·기업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는 시장의 가격 신호를 왜곡합니다. 시장이란 원래 "이 회사 위험하다"는 신호가 금리와 주가에 정직하게 반영돼야 굴러가는데, 그 신호등에 누군가 손을 대 억지로 초록불을 켜 둔 셈입니다. 한보 사태가 '정태수 리스트'라는 이름의 권력형 비리로 번진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법이 지켜야 할 것은 특정인의 이익이 아니라 시장질서의 공정성입니다.
⑤ 회생·파산법의 관점 — 연명의 대가
가장 뼈아픈 지점입니다. 이미 회생 불가능한 부실기업을, 적기에 정리하지 못하고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믿음으로 연명시켰습니다. '대마불사'는 바둑 용어를 빌린 말인데, 쉽게 옮기면 "덩치가 너무 크면 안 죽는다"는 미신입니다. 그런데 이건 회사에는 통하지 않는 주문이에요. 오히려 큰 나무일수록 넘어질 때 옆집까지 덮치죠. 죽어야 할 회사를 살려두는 동안 부실은 눈덩이처럼 커졌고, 그 폭탄은 결국 금융시스템과 국가 경제로 넘어갔습니다. 부실기업의 질서 있는 퇴출, 즉 구조조정 법제의 실패였습니다.
다섯 톱니바퀴는 따로 돌지 않았습니다. 이사가 무리한 투자를 결정하고(①), 은행이 정치적으로 돈을 대고(②), 이를 견제할 이사회가 침묵하고(③), 그 뒤에 유착이 있었으며(④), 무너질 회사를 제때 정리하지 못한(⑤) — 이 다섯이 맞물려 하나의 시스템이 무너졌습니다. 브레이크가 다섯 개나 있었는데, 하필 다섯 개가 동시에 손을 놓은 겁니다. 그래서 '원흉'이 아니라 '상징'입니다.
PART 3.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남았나
한보 사태는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기업법의 '교사(敎師)'가 되었습니다. 등록금이 나라 전체로 치면 뼈아프게 비쌌던, 아주 혹독한 선생님이었죠. 이 사건 이후 우리 사회는 사외이사 제도, 감사위원회, 회계 투명성, 여신 심사 강화, 통합도산법(회생·파산) 정비로 나아갔습니다. 아프게 배운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실무에서 이렇게 느낍니다. 제도는 정비됐지만, 한보를 무너뜨린 그 '구조'는 형태를 바꿔 지금도 반복됩니다. 안전벨트를 새로 달아 놓아도, 매어야 채워지는 법이니까요.
· 오너 한 사람의 결정에 이사회가 "예"만 하는 회사
· 성장에 취해 갚을 수 있는 것보다 크게 빌리는 회사
· 내부통제와 준법감시를 '비용'으로만 여기는 회사
한보는 25년 전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회사의 회의실에서 재현되고 있는 리스크의 원형입니다.
실무 체크리스트 — 오너 경영 기업이 지금 점검할 다섯 가지
한보의 다섯 쟁점을, 오늘의 경영진이 자문해야 할 다섯 질문으로 바꿔드립니다. 저장해 두셨다가 이사회 전에 한 번씩 짚어보십시오. 건강검진처럼, 아플 때가 아니라 멀쩡할 때 받아야 의미가 있습니다.
1. 이사회는 총수의 결정에 '반대'할 수 있는 구조인가 — 반대표가 나온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2. 우리 회사의 이자보상배율은 1을 넘는가 —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감당하고 있는가.
3. 대규모 투자·차입 결정의 회의록과 근거자료가 남아 있는가 — 훗날 이사의 책임을 다퉜을 때 이를 방어할 기록이 있는가.
4. 감사·준법감시 기능이 형식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가.
5. 부실 사업을 '체면' 때문에 연명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 정리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이 다섯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그 회사 안에는 아직 작은 한보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마치며 — 원흉을 찾는 대신, 구조를 읽습니다
한보그룹은 국가부도의 원흉이 아닙니다. 그렇게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 나쁜 기업만 없었으면 됐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추리 드라마의 마지막처럼 범인 하나를 잡고 후련하게 채널을 돌려버리는 거죠. 문제는, 다음 회차에서 똑같은 사고가 또 난다는 겁니다.
진실은 더 불편합니다. 한보는 이사의 의무, 금융의 심사, 이사회의 견제, 권력의 절제, 그리고 퇴출의 용기 — 그 다섯 가지가 동시에 무너질 때 국가 경제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보여준 '시스템 실패의 상징'이었습니다.
기업전문변호사가 이 사건을 계속 들여다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기업법과 금융법, 컴플라이언스와 내부통제는 회사를 옭아매는 규제가 아니라, 회사를 '한보의 결말'로부터 지키는 안전장치이기 때문입니다. 평소엔 거추장스러운 안전벨트가, 사고 나는 그 1초에는 목숨값을 하듯이요.
"무너진 것은 기업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개의 브레이크였습니다. 원흉을 찾는 나라는 위기를 반복하고, 구조를 읽는 회사는 위기를 이겨냅니다."작성 :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 · 변리사 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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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광고 — 게시자 :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 · 변리사 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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