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AI 반도체의 병목은 계산이 아니라 데이터 이동으로 옮겨갔습니다. GPU가 아무리 빨라도 먹일 데이터가 늦으면 놀거든요. 그래서 메모리를 위로 쌓아 GPU 옆에 붙인 것이 HBM입니다.
- 2그런데 HBM은 어느 한 회사의 독자 규격이 아니라 JEDEC이 정한 공개 표준입니다. 표준화 위원회에 참여하려면 자기 필수특허를 합리적이고 비차별적인 조건으로 실시허락하겠다고 확약해야 하죠.
- 3그래서 규격에 걸린 특허로 경쟁사를 막기가 구조적으로 어렵습니다. 경쟁은 "무엇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만드느냐"로 밀려나고, 그건 특허가 아니라 영업비밀의 영역입니다.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변리사 유연입니다.
주방을 하나 상상해 보겠습니다. 세계 최고의 요리사가 있습니다. 손이 빠르기로 소문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재료를 나르는 사람이 한 명뿐입니다. 이 주방의 문제는 요리사의 실력이 아니죠. 요리사는 대부분의 시간을 재료를 기다리며 서 있게 됩니다.
지금 AI 반도체가 정확히 그 주방입니다.
1부에서 반도체의 출발점이 켜짐과 꺼짐이라는 단순한 스위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스위치를 더 작게, 더 많이 넣는 것이 오랫동안 이 산업의 경쟁이었죠. 그런데 AI 시대에 들어서면서 경쟁의 축이 한 번 더 옮겨갔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제가 변리사로서 흥미롭게 보는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HBM 경쟁은 겉보기와 달리 특허 싸움이 아니라는 것. 왜 그런지가 오늘의 핵심입니다.
※ 본 글은 기술 구조와 지식재산 제도를 이해하기 위한 일반적 정보·교육 목적의 칼럼(2026년 8월 기준)이며, 특정 기업에 대한 평가·사실 단정이나 투자권유, 개별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표준화 기구의 정책과 기술 사양은 개정될 수 있으므로 최신 문서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PART 1. 병목이 옮겨갔습니다 — 계산에서 이동으로
GPU가 왜 AI에 쓰이는지부터 짧게 짚겠습니다. AI 연산은 같은 종류의 단순한 계산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반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복잡한 일을 순서대로 처리하는 데 특화된 CPU보다, 단순한 계산기를 수천 개 늘어놓고 동시에 돌리는 GPU가 유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계산할 데이터는 GPU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메모리에 있습니다. 계산 한 번 하려면 데이터를 가져와야 하고, 결과를 다시 써야 하죠.
지난 수십 년 동안 연산 속도는 무섭게 빨라졌습니다. 그런데 데이터를 실어 나르는 통로는 그만큼 넓어지지 못했어요. 그래서 계산 유닛이 데이터를 기다리며 노는 시간이 생깁니다. 업계에서는 이 현상을 오래전부터 메모리 벽이라고 불러왔습니다.
AI에서는 이게 특히 심각합니다. 모델의 파라미터가 수천억 개 단위가 되면, 계산 한 번을 위해 읽어야 할 데이터의 양이 어마어마해집니다. 아무리 좋은 GPU를 사도 데이터가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그 성능을 다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관점 전환입니다. AI 시대의 성능은 얼마나 빨리 계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안 굶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PART 2. 해법은 넓히는 게 아니라 쌓아서 붙이는 것
통로를 넓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순합니다. 선을 더 많이 깔면 됩니다.
그런데 기존 방식은 메모리를 기판 위 여기저기에 옆으로 늘어놓는 구조였습니다. 이러면 선을 많이 깔기도 어렵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신호가 약해지고 전력도 더 듭니다. 옆으로 넓히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발상을 바꿉니다. 옆으로 늘어놓지 말고 위로 쌓자. 그리고 GPU에서 멀리 두지 말고 바로 옆에 붙이자.
여러 층으로 쌓은 메모리를 층마다 관통하는 수직 통로로 잇고, 그 덩어리를 GPU와 나란히 앉히는 것. 이게 HBM, 고대역폭 메모리입니다. 대역폭이라는 말이 어렵게 들리지만 그냥 통로의 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 번에 얼마나 많이 지나갈 수 있느냐죠.
적층을 실제로 어떻게 하는지, 그 사이 빈틈은 어떻게 메우고 열은 어떻게 빼는지는 앞서 MR-MUF 편에서 부엌 비유로 자세히 풀어드렸으니 여기서는 넘어가겠습니다. 오늘 중요한 건 결과입니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HBM은 AI 반도체의 병목을 계산 능력에서 데이터 이동으로 옮겨버렸습니다. 그리고 병목이 옮겨가면, 돈과 협상력도 함께 옮겨갑니다.
PART 3. ★ 여기서 법률가의 눈이 멈춥니다 — HBM은 '표준'입니다
이제 오늘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기술 기사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HBM은 어느 한 회사의 독자 규격이 아닙니다. JEDEC이라는 국제 표준화 기구가 정한 공개 표준입니다. 예를 들어 HBM3는 JESD238이라는 문서 번호를 갖고 있습니다. 층수, 신호 방식, 핀 배치, 동작 규약이 문서에 적혀 있고, 누구나 그 규격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표준으로 만들까요. GPU를 만드는 회사와 메모리를 만드는 회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 맞물려야 하니 규격이 같아야 하죠. 앞서 구글과 오라클 편에서 API를 콘센트 규격에 비유했는데, HBM도 정확히 같은 성격입니다. 규격이 통일돼야 시장이 생깁니다.
그런데 표준에는 무거운 법적 부담이 따라옵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JEDEC의 특허 정책을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위원회에 참여하는 회원사는 참여의 조건으로, 자신이 보유한 표준필수특허를 합리적이고 비차별적인 조건(RAND)으로 실시허락하겠다고 확약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필수 가능성이 있는 특허를 공개할 의무를 집니다. 만약 그런 조건으로 라이선스할 생각이 없다면, 위원장에게 알리고 위원회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표준을 함께 만들면서, 그 표준에 걸린 자기 특허로 남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왜 이런 규칙이 필요할까요. 표준은 모두가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목에 누군가 특허를 숨겨두었다가, 업계 전체가 그 규격에 맞춰 설비를 다 깔고 난 뒤에 통행료를 요구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미 되돌릴 수 없으니 부르는 값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메모리 분야에서 표준화 과정의 특허 공개를 둘러싼 다툼이 있었고, 그 경험을 거치며 공개 의무와 확약 절차가 지금처럼 정비돼 왔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명제입니다. 표준은 특허의 힘을 의도적으로 눌러둔 영역입니다.이건 특허 제도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정교한 조정이에요. 표준에 들어간 특허의 권리자는 로열티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로열티가 합리적이어야 하고, 특정 회사만 골라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죠. 값은 받되 문은 못 잠근다는 뜻입니다.
PART 4. ★ 그럼 경쟁은 어디서 벌어지나 — 만드는 법으로 밀려납니다
여기서 자연스러운 질문이 나옵니다. 규격이 다 공개돼 있고, 필수특허로 남을 막지도 못한다면, 왜 아무나 HBM을 못 만들까요. 그리고 만드는 회사들 사이에도 왜 그렇게 차이가 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같은 설계도로 지어도 시공사에 따라 건물이 다릅니다.
표준 문서에는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어떻게 만드는지는 안 적혀 있어요. 그리고 HBM에서 승부를 가르는 건 대부분 후자입니다.
· 종잇장처럼 얇게 갈아낸 웨이퍼를 깨뜨리지 않고 다루는 법
· 수십 층을 미크론 단위로 정렬해 쌓는 법
· 층 사이 빈틈을 메우고 열을 빼는 법
· 그리고 이 모든 걸 하면서 불량을 줄이는 법, 즉 수율
이 영역이 왜 특허가 아니라 비밀의 자리인지는 앞서 향수 편에서 세운 기준으로 바로 설명됩니다. 그때 이렇게 물었죠. 제품을 뜯어보면 드러나는가.
완성된 HBM을 잘라 단면을 보면 구조는 보입니다. 몇 층인지, 어떻게 연결됐는지는 드러나요. 그래서 그건 특허로 지킵니다. 그런데 그 구조를 만들기 위해 어떤 온도로 몇 초를 돌렸는지, 어떤 배합의 재료를 썼는지, 불량이 나는 지점을 어떻게 잡아냈는지는 완성품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건 감춰서 지킵니다.
그래서 세 번째 명제입니다. 표준이 특허의 힘을 누르면, 경쟁은 영업비밀로 이동합니다.그리고 이 문장이 요즘 이 분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상당 부분 설명해 줍니다. 왜 유독 이 산업에서 인력 이동과 기술 유출이 반복해서 문제가 되는지. 왜 회사들이 특허 소송보다 보안과 인사 관리에 더 예민한지. 지킬 것이 등록부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공정 속에 있으니까요.
앞서 배터리 3부작에서 다룬 이야기가 그대로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1부에서 제가 반도체 특허 일을 하며 가장 많이 한 판단이 "출원할 것인가 묻어둘 것인가"였다고 했는데, HBM은 그 판단이 가장 첨예하게 갈리는 자리입니다.
PART 5. 병목을 쥔 자리가 협상력을 갖습니다
마지막으로 생태계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AI 반도체는 한 회사가 만들지 않습니다. 장비를 만드는 회사가 있고, 그 장비로 칩을 찍는 파운드리가 있고, 메모리를 만드는 회사가 있고, 그것들을 묶어 GPU로 파는 회사가 있고, 그 GPU를 사서 서비스를 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이 사슬에서 협상력은 균등하게 나뉘지 않습니다. 규칙은 단순해요. 대체하기 어려운 자리가 힘을 갖습니다.
그래서 병목이 어디에 있느냐가 곧 누가 갑이냐를 정합니다. 계산이 병목이던 시절과 데이터 이동이 병목인 시절은 힘의 분포가 다릅니다. 그리고 힘의 분포가 바뀌면 계약서의 문법도 바뀝니다. 장기 공급 계약, 선급금, 물량 보장, 우선 공급권 같은 조항들이 협상 테이블에 올라오는 게 그래서입니다. 공급받는 쪽은 물량을 확보하려 하고, 공급하는 쪽은 그 대가로 예측 가능한 수요를 받아내려 하죠.
다만 여기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병목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기술의 역사에서 병목은 계속 옮겨 다녔어요. 진공관에서 배선으로, 배선에서 미세화로, 미세화에서 데이터 이동으로. 지금의 협상력이 다음 세대에도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국면의 계약에서는 기간과 조건, 그리고 기술 세대가 바뀔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함께 설계해 두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유리하다고 길게 묶는 것도, 지금 급하다고 나쁜 조건을 받는 것도 모두 다음 국면에서 부메랑이 됩니다.
저장해 두세요 — 표준 위에서 사업한다면
1. 표준화 기구의 특허 정책부터 읽어라 — 위원회 참여의 대가로 무엇을 확약하게 되는지가 거기 적혀 있다.
2. 표준 영역과 구현 영역을 나눠 전략을 짜라 — 규격은 공유하되, 만드는 법은 감춘다.
3. 표준필수특허는 배제 무기가 아니라 로열티 자산으로 관리하라 — 값은 받되 문은 못 잠근다.
4. 지킬 것이 등록부에 없다면 예산도 그쪽으로 옮겨라 — 공정 노하우가 자산인 회사는 특허 예산만큼 인사와 보안에 써야 한다.
5. 병목의 위치를 주기적으로 다시 그려라 — 협상력은 병목을 따라 이동하고, 계약 기간은 그 이동보다 짧아야 한다.
마치며 — 스위치의 개수에서, 데이터의 속도로
정리하겠습니다. 1부에서 본 반도체의 출발점은 켜짐과 꺼짐이라는 스위치였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산업의 경쟁은 그 스위치를 더 작게, 더 많이, 더 싸게 만드는 게임이었죠. 그런데 AI 시대에 들어서면서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스위치를 얼마나 많이 넣느냐보다, 그 스위치들에게 데이터를 얼마나 빨리 가져다주느냐가 승부를 가릅니다. (그사이 한국 메모리 산업이 어떻게 그 게임을 지배했는지는 따로 한 편으로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지식재산의 관점에서도 무게중심이 함께 옮겨갔습니다.
· 발명의 시대 —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가 문제였고, 답은 특허였습니다.
· 표준의 시대 — 서로 맞물려야 시장이 열리니, 규격은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 그리고 지금 — 규격이 같아진 자리에서 승부가 제조로 내려왔고, 그 제조는 등록부에 적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반도체 기업을 볼 때 특허 건수를 먼저 세지 않습니다. 이 회사가 가진 것 중 문서에 적을 수 있는 것과 적을 수 없는 것이 각각 무엇인지를 봅니다. 적을 수 있는 건 등록해서 지키면 되지만, 적을 수 없는 것은 사람과 절차로 지켜야 하니까요. 그리고 요즘 이 산업의 진짜 자산은 대부분 후자에 있습니다.
1부에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드는 일과 지키는 일과 나누는 일은 늘 같이 간다고요. HBM은 그 셋이 한 칩 안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자리입니다. 표준으로 나누고, 특허로 지키고, 비밀로 감추면서요.
"표준은 특허의 힘을 의도적으로 눌러둔 영역입니다. 값은 받되 문은 못 잠그게 하죠. 그래서 규격이 같아진 자리에서 경쟁은 '무엇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만드느냐'로 밀려나고, 그건 특허가 아니라 비밀의 영역입니다. HBM 시대에 지킬 것이 등록부에 없는 이유입니다."작성 :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 · 변리사 유연
※ 본 글은 기술 구조와 지식재산 제도를 이해하기 위한 일반적 정보·교육 목적의 칼럼(2026년 8월 기준)이며, 특정 기업에 대한 평가·사실 단정이나 투자권유, 개별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표준화 기구의 특허 정책과 표준 문서는 개정되므로 실행 전 최신 원문을 확인해야 하고, 표준필수특허와 실시조건을 둘러싼 판단은 국가와 사안에 따라 달라집니다. 기술 설명은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화했습니다.
(반도체 이야기 : ① 스위치 하나의 혁명 · ③ HBM, 표준과 비밀)
(함께 보기 : 「MR-MUF를 아파트 짓기로 풀어드립니다」 · 「샤넬 No.5에는 왜 특허가 없을까」 · 「남의 콘센트 규격을 베끼면 도둑일까 — 구글 vs 오라클」 · 「우리는 훔치지 않았다는 말로는 증명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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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광고 — 게시자 :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 · 변리사 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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