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CPU는 설계와 명령어 체계가 특허와 라이선스로 오래 묶여 온 시장입니다. 후발주자에게는 기술 이전에 권리의 문이 먼저 닫혀 있었죠.
- 2반면 메모리는 표준 규격입니다. 규격이 공개돼 있어 법적으로는 누구나 만들 수 있습니다. 한국은 법이 잠근 문 대신, 법은 열려 있지만 자본과 공정이 잠근 문을 골랐습니다.
- 3그 문 뒤의 진짜 관문이 수율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율은 특허로 지킬 수 없습니다. 특허는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호할 뿐, 얼마나 잘 만드는지는 보호하지 않으니까요.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변리사 유연입니다.
학교 다닐 때 이런 친구가 꼭 한 명 있었습니다. 저보다 문제를 빨리 푸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더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 성적은 늘 저보다 좋은 친구요. 한참 뒤에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 친구는 실수를 안 했습니다. 저는 아는 문제도 계산에서 틀렸고요.
반도체 산업이 정확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의 절반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1부에서 반도체가 켜짐과 꺼짐이라는 스위치에서 출발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3부에서는 AI 시대에 병목이 데이터 이동으로 옮겨간 이야기를 했죠. 오늘은 그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그 스위치를 미친 듯이 작게, 많이, 싸게 만드는 게임에서 왜 한국이 앞섰는가.
그리고 저는 이 질문에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답해 보려 합니다. 흔히 결단이나 투자 규모로 설명하는 이야기를, 권리의 구조로 읽어보겠습니다.
※ 본 글은 산업 구조와 지식재산 제도를 이해하기 위한 일반적 정보·교육 목적의 칼럼(2026년 8월 기준)이며, 특정 기업에 대한 평가·사실 단정이나 투자권유, 개별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기술 설명은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화했습니다.
PART 1. 두 종류의 기억 — 책상 위와 서랍 속
먼저 메모리가 무엇인지 짧게 정리하겠습니다. 컴퓨터에는 계산하는 장치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계산할 데이터를 어딘가 놓아둘 자리도 필요하죠. 그게 메모리입니다.
크게 두 종류입니다.
· 디램(DRAM) — 지금 당장 쓰는 데이터를 올려두는 자리입니다. 아주 빠릅니다. 대신 전원이 꺼지면 내용이 사라집니다. 심지어 전원이 켜져 있어도 가만두면 사라져서, 계속 다시 채워 넣어야 합니다. 작은 그릇에 물을 담아두는데 그 그릇에 미세한 구멍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물을 다시 부어줘야 하죠.
· 낸드 플래시(NAND) — 전원이 꺼져도 내용이 남습니다. 대신 디램보다 느립니다. 우리가 쓰는 SSD와 휴대폰 저장 공간이 이것입니다.
책상으로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디램은 지금 펼쳐놓고 작업 중인 책상 위이고, 낸드는 일이 끝나면 정리해 넣는 서랍입니다. 책상은 넓고 손이 빨리 닿아야 하고, 서랍은 문을 닫아도 내용물이 그대로 있어야 하죠. 둘은 역할이 달라서 서로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PC든 휴대폰이든 서버든 자동차든 둘 다 필요합니다.
여기까지가 기술 이야기입니다. 이제 본론입니다.
PART 2. ★ 왜 CPU가 아니었을까 — 문이 두 개 있었습니다
반도체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앞에는 여러 갈래가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화려한 자리는 단연 CPU였죠. 컴퓨터의 두뇌이고, 이윤도 큽니다.
그런데 CPU 시장에는 기술과 별개로 하나의 벽이 더 있었습니다. 권리의 벽입니다.
CPU는 단순한 부품이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입니다. 명령어 체계라는 약속이 있고, 그 약속 위에 수십 년치 소프트웨어가 쌓여 있습니다. 그러니 새로 만든 CPU가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기존 소프트웨어가 안 돌아가면 아무도 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기존 체계와 호환되게 만들려 하면 이번에는 권리 문제가 기다립니다. 주요 명령어 체계와 그 주변 기술은 오랫동안 소수 기업이 보유한 특허와 그들 사이의 라이선스로 촘촘히 묶여 있었거든요.
즉 후발주자가 CPU를 하려면 기술 장벽을 넘기 전에 권리의 문부터 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의 열쇠는 대개 안쪽에서만 열립니다.
반면 메모리는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3부에서 HBM이 JEDEC 표준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메모리는 원래부터 그런 세계였습니다. 규격이 표준화 기구에서 공개적으로 정해집니다. 몇 개의 핀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지, 신호를 어떻게 주고받을지가 문서에 적혀 있고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어느 회사 메모리를 꽂아도 컴퓨터가 작동하니까요.
그래서 메모리는 법적으로 열린 시장이었습니다. 규격대로 만들면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 관점 전환입니다. 한국이 고른 것은 쉬운 문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문이었습니다. 법이 잠근 문 대신, 법은 열려 있지만 자본과 공정이 잠근 문을 고른 겁니다.후발주자로서는 대단히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권리로 잠긴 문은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이 지나야 열리지만, 돈과 기술로 잠긴 문은 돈과 기술을 쏟아부으면 열리니까요. 앞서 미국 판례 편에서 경계선 하나가 산업 하나를 만든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경계선이 후발주자의 진입로를 정한 셈입니다.
다만 균형을 잡겠습니다. 열려 있다는 것이 쉽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공장 하나에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이고, 이 산업은 몇 년마다 가격이 폭락하는 시기를 반복해서 겪습니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그 안은 아주 험한 곳이었습니다.
PART 3. ★ 열린 문 뒤의 진짜 관문 — 수율
규격이 같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제품 자체로는 차별화가 어려워집니다. 같은 규격의 디램이라면 성능도 비슷하고 쓰임도 같습니다.
그럼 무엇으로 이길까요. 원가입니다. 그리고 원가를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가 수율입니다.
수율은 만든 것 중에 제대로 나온 비율입니다. 웨이퍼 한 장을 가공해서 칩 100개를 만들었는데 90개가 정상이면 90퍼센트, 99개가 정상이면 99퍼센트입니다.
이 차이가 왜 그렇게 클까요. 들어간 비용이 같기 때문입니다. 웨이퍼 값도, 장비 감가상각도, 전기 요금도, 사람 인건비도 똑같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팔 수 있는 물건의 개수가 다릅니다.
같은 밀가루와 같은 오븐으로 빵을 굽는데 한쪽은 90개를 팔고 다른 쪽은 99개를 파는 겁니다. 재료비는 똑같이 냈고요. 그러니 개당 원가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메모리는 주기적으로 가격이 크게 떨어지는 산업입니다. 공급이 몰리면 값이 무너지고, 그때는 팔수록 손해인 구간이 옵니다. 이 시기를 누가 견디느냐가 다음 사이클의 판도를 정합니다.
이때 살아남는 쪽은 원가가 낮은 쪽입니다. 다시 말해 수율이 높은 쪽이죠.
그래서 두 번째 명제입니다. 수율은 평상시에는 마진이고, 불황에는 생존입니다.그러니 이 산업의 승자는 가장 똑똑한 칩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가장 많이 만들면서 불량을 가장 적게 내는 회사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그 친구처럼요. 빨리 푸는 사람이 아니라 틀리지 않는 사람이 이깁니다.
PART 4. ★ 그런데 수율은 특허로 지킬 수 없습니다
이제 변리사로서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수율이 그렇게 중요한 자산이라면, 그건 어떤 권리로 보호될까요. 특허일까요.
아닙니다. 특허는 수율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특허가 보호하는 것은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입니다. 새로운 구조, 새로운 방법, 새로운 물질. 그런데 수율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수율은 얼마나 잘 만드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법은 잘하는 것을 권리로 주지 않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특허를 받으려면 발명을 명세서에 적어야 합니다. 통상의 기술자가 그대로 실시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런데 수율은 한 문장으로 적히지 않습니다.
수율은 축적이거든요. 어떤 장비가 어떤 계절에 어떻게 흔들리는지, 어느 공정 단계에서 불량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지, 그때 무엇을 조정하면 잡히는지. 수천 번의 실패에서 나온 데이터가 사람과 절차와 설비 세팅에 흩어져 쌓여 있는 것입니다. 발명이라기보다 경험에 가깝고, 그래서 명세서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명제입니다. 특허는 남이 못 만들게 하고, 수율은 남이 못 따라오게 합니다. 앞의 것은 법이 주는 것이고, 뒤의 것은 시간이 주는 것입니다.그리고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더 있습니다.
1부에서 특허를 만기 20년짜리 정기예금에 비유했습니다. 20년이 지나면 원금이 사회로 넘어간다고요. 그런데 수율 격차에는 만기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조건이 붙습니다. 지키는 동안에만 유지됩니다. 특허는 등록해 두면 내가 잊고 있어도 남아 있지만, 수율은 사람이 빠져나가고 기록이 새어 나가면 그 순간 격차가 줄어듭니다.
그러니 이 자산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만기는 없지만 방심하면 사라지는 자산.
PART 5. 그래서 이 산업의 자산은 등록부에도 장부에도 없습니다
수율을 특허로 지킬 수 없다면 무엇으로 지킬까요. 답은 앞서 여러 번 다룬 그것입니다. 영업비밀입니다.
향수 편에서 세운 기준을 다시 가져오면 명확합니다. 제품을 뜯어보면 드러나는가. 완성된 메모리를 잘라 단면을 보면 구조는 보입니다. 그건 특허로 지키면 됩니다. 그런데 그 구조를 만들면서 불량을 어떻게 잡았는지는 완성품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건 감춰서 지킵니다.
그리고 이 문장이 이 산업의 여러 현상을 설명합니다.
왜 이 분야에서 인력 이동이 그토록 민감한지. 왜 회사들이 특허 소송보다 보안과 인사 관리에 더 예민한지. 왜 경쟁사 출신을 채용할 때 그렇게 조심스러운 절차를 두는지. 지킬 것이 등록부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공정 속에 있으니까요. 앞서 경력직 채용 편에서 다룬 이야기가 이 산업에서 가장 첨예하게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균형을 덧붙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 산업에서 특허가 의미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반도체 기업들은 방대한 특허를 쌓습니다. 다만 그 특허의 쓰임이 다릅니다. 1부에서 본 것처럼 이 산업의 특허는 상대를 배제하는 무기보다 협상 테이블에 낼 카드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허는 협상력이고, 수율은 원가입니다. 둘은 역할이 다르고, 둘 다 필요합니다.
저장해 두세요 — 제조 기업의 자산을 읽는 다섯 가지
1. 그 시장이 왜 열려 있는지 물어라 — 규격이 표준인 시장은 법적으로 열려 있고, 대신 자본과 공정으로 잠겨 있다.
2. 같은 규격이면 승부는 원가에서 난다 — 그리고 원가의 대부분은 수율이 정한다.
3. 특허는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호할 뿐, 얼마나 잘 만드는지는 보호하지 않는다.
4. 만기를 비교하라 — 특허는 20년이면 끝나지만, 수율 격차는 만기가 없다. 대신 지키지 않으면 사라진다.
5. 지킬 것이 등록부에 없다면 보호 방식도 달라야 한다 — 사람과 절차와 기록이 그 자산의 울타리다.
마치며 — 가장 똑똑한 회사가 아니라, 가장 덜 틀리는 회사
정리하겠습니다. 왜 한국이 CPU가 아니라 메모리였는가.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CPU의 문은 권리로 잠겨 있었고, 메모리의 문은 법적으로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린 문을 고른 대가로, 규격이 아니라 제조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 싸움의 이름이 수율이었고요.
저는 이 대목이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인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산업의 승자는 가장 화려한 발명을 한 회사가 아닙니다. 같은 규격의 물건을, 남보다 조금 덜 틀리면서, 수십 년 동안 반복해서 만들어낸 회사입니다. 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지루한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지루함이 가장 따라 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법률가로서 덧붙이자면, 그래서 이 산업의 진짜 자산은 두 장부 모두에 안 적힙니다. 특허 등록부에도 없고, 재무제표에도 한 줄로 나오지 않습니다. 굳이 찾자면 사람들의 손끝과 공정 기록과 실패 데이터 속에 있죠.
1부에서 만드는 일과 지키는 일과 나누는 일은 늘 같이 간다고 했습니다. 메모리는 그중 지키는 일이 유독 어려운 자리입니다. 지킬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다음은 3부입니다. 그렇게 다져온 제조 역량이 AI 시대에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됐는지, HBM 이야기로 이어가겠습니다.
"특허는 남이 못 만들게 하고, 수율은 남이 못 따라오게 합니다. 앞은 법이 주는 것이고 뒤는 시간이 주는 것이죠. 그리고 특허는 20년이면 끝나지만 수율 격차에는 만기가 없습니다 — 대신 지키지 않으면 사라집니다."작성 :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 · 변리사 유연
※ 본 글은 산업 구조와 지식재산 제도를 이해하기 위한 일반적 정보·교육 목적의 칼럼(2026년 8월 기준)이며, 특정 기업에 대한 평가·사실 단정이나 투자권유, 개별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기술과 산업사에 관한 서술은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단순화한 것이고, 지식재산 제도는 국가별로 다르며 계속 개정됩니다.
(반도체 이야기 : ① 스위치 하나의 혁명 · ② 수율이라는 자산 · ③ HBM, 표준과 비밀)
(함께 보기 : 「샤넬 No.5에는 왜 특허가 없을까 — 특허냐 영업비밀이냐」 · 「우리는 훔치지 않았다는 말로는 증명되지 않습니다」 · 「MR-MUF를 아파트 짓기로 풀어드립니다」)
※ 고지 본 사이트의 게시물은 관련 법령과 실무를 이해하기 위한 일반적 정보·교육 목적의 자료이며, 개별 사안에 대한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법령·판례와 그 해석은 변경될 수 있고 구체적 결론은 사실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진행 중인 사안의 결과를 확정적으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변호사 광고 — 게시자 : 법무법인 리브로 대표변호사 · 변리사 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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